Delete Modify 김세중 Number : 133, Access : 4571 , Lines : 29
상상력이 부족한(?) 한국기업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중장년 한국인들에게 ‘상상력’이란 용어는 아직도 낯설다. 일부 예술가에게만 해당되거나, 무슨 공상만화나 백일몽(白日夢)으로 오해되곤 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대단한 모욕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일류 기업을 방문하면 ‘상상력’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데 놀란다.

빌 게이츠는 늘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재산이라곤 직원들의 상상력뿐”이라고 말한다. 산업계에서 상상력이란 요즘 말로 ‘블루오션’(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파워다. 문제는 지금 한국의 산업계가 ‘상상력의 덫’에 걸렸다는 데 있다.

오늘날 한국의 주력 산업은 제로섬(Zero-sum) 게임에서 스피드로 밀어붙여 성장했다. 선진국 경쟁업체들은 에러를 범하거나 자멸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소니는 자기 방식에만 집착하다가 몰락해 삼성전자를 도와주었고, GM은 과도한 퇴직연금으로 무너져 현대자동차의 기(氣)를 살려주었다.

선진국 조선업체들이 과도한 인건비로 비틀거리는 사이, 국내 업체들이 수주(受注)를 휩쓸었다. 하지만 세계는 뒤늦게 정신차리고 있다. 한국 기업이 잘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곳곳에서 견제가 시작됐다.

최근 미국 인텔이 낸드(nand) 플래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해서 국내 주가가 폭락했다. 사실 이것은 국가적 비상사태와도 같다. 우리의 최대 ‘먹을거리’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등에 주로 사용되는 낸드 플래시는 삼성이 독자개발한 품목은 아니다.

삼성은 단지 4년 전 도시바의 합작 제의를 뿌리치고 총알 같은 의사 결정으로 낸드 플래시 시장을 선점하며 호황을 누려왔다. 이를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게 인텔의 결정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증시 호황기에도 철강업체 주가만 빠지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수요가 막대한 중국 업체들이 가격인하로 국내 업체를 압박하니 덩달아 가격을 내리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게 됐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한국 기업들의 성장 전략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블루오션이 아니라, 경쟁자가 많은 레드오션에서 빨리 치고 나가는 ‘패스트 폴로어(Fast follower)’인데 원인이 있다. 이제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중국이 압박하는 것이다.

대안은 역시 CEO의 결단이다. 올여름 전경련이 주최한 제주도 세미나에 온 보스턴컨설팅의 칼 스턴 회장은 “한국 CEO들은 성장 시장인 블루오션에 역량의 60%를 집중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블루오션적인 상상력 배양에는 유대인 방식이 좋다고 한다. 끊임없이 ‘왜’를 반복하며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다. “왜 장미는 빨간색인가”란 질문을 캐물어 결국 파란색 장미를 만들어 히트 치는 식이다. ‘5+5=?’ 대신에 ‘10=?+?’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귀납법은 연역법으로, 연역법은 귀납법으로 발상을 달리해본다.

하지만 아직 우리 기업체 수뇌부는 상상력 양성에 관심이 적다. 어느 대기업 CEO는 기자에게 “나 재임 중엔 괜찮겠지만, 그 이후론 무얼 해야 할지 답답하다. 정말 상상력을 빌려주었으면 한다”고 탄식했다.

충격적이게도 미래 전략을 설정한 국내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장 연말 실적 때문인지 아직도 밀어내기 판매에 목숨 거는 CEO가 있는가 하면, 다가오는 인사에 촉각을 기울이느라 일손을 놓은 전문경영인도 많다. 국내 산업계에 상상력의 단비가 그립다.

최홍섭, 산업부 경제단체팀장, 조선일보, 2005.12.1
2006/01/28 (15:48) from 211.55.43.227' of 211.55.4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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