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회계는 없는가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 제프리 존스는 “상장사 가운데 회사 정보를 믿을 만한 곳이 10개도 안될 것”이라고 경총 최고 경영자 연찬회에서 말했다고 한다. 상장사가 1000개가 넘으니 상장사 99%는 많거나 적거나 회계분식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00억원의 이익이 발생하리라고 예상했던 한 중견업체가 환율 변동으로 갑작스런 100억원의 환차손이 발생해 이익이 제로(0)가 될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기업은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 은행에서 대출을 꺼리게 돼 해당 기업은 도산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이 기업은 분식회계를 해 이익을 내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 환차손 100억원을 3년간으로 나누어 비용으로 부담할 수 있다면 이 기업은 작년에 67억원의 이익을 낼 수 있다. 더 나아가 감가상각비가 적게 계상되도록 정률법에서 정액법으로 바꾸면 이익은 더 올라간다.
회계학은 과학(science)이 아니고 기술(art)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계학이 과학에 미치지 못하고 기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위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로(0)의 이익이 67억원의 이익이 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회계학을 과학으로 보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회계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에 의해 일관되게 정리되지 않고 수 개 패러다임에 의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이익의 진실성·연역적 패러다임, 인류학적·귀납적 패러다임, 사회적·거시경제적 패러다임 등이 있다.
사회적·거시경제적 패러다임에 중점을 두면 회계 목적은 국가 경제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정책의 일부가 된다. 즉 불황기에는 기업이 이익 배당을 많이 하고 투자를 촉진할 수 있도록, 반대로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투자를 자제할 수 있도록 회계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것이다. 스웨덴은 이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미국에서는 이익의 진실성·연역적 패러다임을 기본으로 엄격한 규범적(normative) 회계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사회적·거시경제적 패러다임을 가끔 적용하고 있다.
케네디, 존슨, 닉슨 정부는 고정자산 투자 세액공제의 회계를 법인세에서 공제하기보다는 투자자산을 감소하는 방법으로 회계처리하려는 회계기준심의회(APB, FASB)의 의견을 연기하도록 종용한 바 있다고 한다. 투자세액 공제제도에 의한 미국 경제 정책이 회계기준심의회의 회계처리로 인해 정책효과의 감소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리스회계, 인플레이션 회계, 도산 기업의 구조조정 회계, 창업 초기 기업의 회계, 석유화학 산업의 회계에서도 사회적·거시경제적 패러다임면에서도 검토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후유증이 남아있다. IMF 당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것을 보았던 금융기관은 여유자금이 있어도 비교적 건전한 기업에도 대출을 꺼리고 있어 신용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IMF 당시 주식가격이 크게 하락해 충격을 받은 주식투자자들도 투자를 주저하고 있어 주식시장이 침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이 결손이 났다고 보고되면 금융기관이나 투자자의 심리는 더욱 위축되고 경제는 불황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회계가 우리나라 경제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회계처리 방법에 의해 소생할 수 있는 기업이 도산한다면 회계는 기업에 대해 무엇인가라는 반문이 나온다. 기업이 있고 그 후에 회계가 있는 것이며, 회계논리만 따지다가 기업이 죽는다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회계는 미국식 회계를 많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회계 잣대와 한국 회계 잣대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나라 기업 경제와 미국의 기업 경제는 아주 다르다. 미국 경제는 엄격한 회계에 의해 크게 영향받지 않으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국 회계제도를 회계 표준인 양 따르고 있는 것은 IMF체제 이후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한 영향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미국식 회계인 연역적·규범적(normative)인 엄격한 회계보다는 한국의 현재 상황에 맞는 한국적 회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연역적·규범적 회계를 반대하기보다는 이를 향하기 위한 중간적·과도기적 회계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제 걸음마를 배운 어린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99%가 넘는 사람이 지키지 못하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며 그 법은 고쳐야 한다.
엄격한 회계기준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조금 느슨한 회계기준으로 바꾸어, 이익이 나게 되면 더 이상 분식회계는 하지 않을 것이므로 분식회계를 막는 측면도 있다.
우리 회계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나치게 의식하다가 이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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